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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나리오를 잃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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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프랑스의 라가르드 재무장관은 독일에 세금 인하를 요구했다
그래야 독일 소비자가 프랑스 제품을 구입할 여력이 생긴다는 논리였다
제조업 강국인 독일은 경제 위기 속에서도 수출이 잘 되어 유럽연합의 든든한 버팀목 노릇을 하지만
프랑스는 좀처럼 수출이 안 늘어나고 있으니 이런 볼멘소리가 나온 것이다

유로라는 단일 통화를 도입한 이후로 사실 독일은 덕을 많이 보았다
유럽 각국이 따로 통화를 운용하던 시절에는
자국의 화폐 가치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려 수출경쟁력을 높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죽으나 사나 예전의 자국 통화보다 가치가 높은 유로화를 써야 한다
수입을 할 때는 좋을지 몰라도 수출에는 불리하다. 상대적으로 독일의 수출 경쟁력은 올라간다
그리스도 스페인도 이탈리아도 프랑스의 수출이 부진한 이유 중의 하나다
그러나 프랑스 수출 부진의 주범은 독일이 아니라 중국이다
중국의 5월 대외 수출액은 작년보다 무려 48.5%나 늘었다. 중국의 최대 수출 시장인
대유럽 지역 수출도 49% 늘었다

금융 위기로 유럽 각국이 천문학적 부채를 진 상태에서 경기 부양을 위해
언제까지나 공적 자금을 계속해서 투입하기는 어렵다
빚을 줄이기 위해 공공 부문의 채용을 줄이고 복지수당을 줄이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국가 부채를 덜어내기 위해서는
세입이 늘어야 하고 그러자면 민간 경제가 살아나야 한다. 그 원동력은 수출이다
현 보수당 정부도 그렇고 지난 노동당 정부도 그렇고 영국이 막대한 국가 부채로 인해 파운드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이 늘어나서 경기가 살아나리라는 데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이 실현될지의 여부는 불투명하다
파운드화 가치가 금융 위기 이후 25%나 떨어졌는데도 영국 제품의 수출은 좀처럼 안 는다
유럽에는 독일이라는 벽이 있고 세계에는 중국이라는 더 높은 벽이 있어서다
유럽의 고민은 중국은 못 만들고 유럽만이 만들 수 있는 물건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데 있다

중국의 자신감은 자국 노동자 파업을 다루는 정부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델, 휴렛패커드,애플 등 세계 유수의 컴퓨터업체에 납품하는 대만 기업 폭스콘의 선전 공장에서
중국 노동자가 잇따라 자살하자 중국 언론은 폭스콘 공장의 억압적 분위기를 문제시 삼았다
그러자 폭스콘은 임금을 30% 올리겠다고 밝혔다
폭스콘이 고용한 중국 노동자는 80만명이고 선전에만 40만명에 이른다
폭스콘의 순익은 크게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중국 시장에서 퇴출당하는 것보다는 낫다
중국 언론의 동향은 중국 정부의 생각을 반영한다. 중국 정부는 베이징 지역의 최저 임금을 20% 올린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는 이제 중국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라고 외국 기업에 요구해도 될 만큼
외국 기업의 중국 의존도가 돌이킬 수 없이 깊어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동안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농촌으로부터 저임 노동력이 끊임없이 공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 경제가 커지면서 산업 예비군은 급감했다. 게다가 경제 발전으로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늘어나니
단조로운 공장 노동을 기피하는 노동자가 늘어났다
같은 돈을 받더라도 공장의 콘베이어 벨트보다는 백화점에서 물건을 팔거나
고급 식당에서 음식을 나르는 것이 한결 낫다고 생각하는 중국인이 급증한 것이다
제조업체는 이제 한정된 노동력을 놓고 백화점, 고급 식당하고도 경쟁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명시적 압력이 없더라도 월급을 안 올려줄 재간이 없다

중국 노동자의 봉급 인상은 중국의 내수 시장이 커진다는 의미도 있다
봉급 인상으로 노동자의 지갑이 두둑해지면 결국 소비가 늘어나고 중국 경제의 수출 의존도는 낮아진다
그동안 중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국의 막강한 내수 시장에 수출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키워왔지만
앞으로는 미국처럼 세계의 내수 시장으로 세계의 돈을 빨아들이는 방식으로
경제를 키워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의 이런 경제 발전은 지속가능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천문학적 부채에도 세계 경제에서 큰소리를 친 것은 세계 최대의 소비 시장 노릇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지속 가능한 방식이 아니다
부동산 거품이 언젠가는 터지는 것처럼 지출 여력을 넘어서는 소비는 언젠가는 한계에 봉착한다
그리고 끌어당겨서 쓴 돈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흔들리는 달러 가치를
유로화 같은 대안 통화 가치를 무너뜨리는 식으로 해결하려 든다
그러나 중국은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다. 쓸 돈이 넘쳐난다
이런 추세로라면 몇 해 전 독일로부터 세계 최대의 수출국 자리를 빼앗은 데 이어
세계 최대의 소비국 자리를 미국으로부터 빼앗을 날이 멀지 않았다

중국은 80년대 초 경제 개방을 하면서 노동자의 파업권을 없앴다. 서방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30년이 지난 지금 서방 국가처럼 노동자의 파업권이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정부가 실질적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끌어올리려고
유무형의 압력을 넣는다. 대세가 자본주의라서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없이
중국 정부가 인민을 배신하고 속절없이 끌려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중국에는 시나리오가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뒤 물질 숭배가 기승을 부리고 부패가 만연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중국을 이끌어가는 엘리트 집단은 사익이 아니라 공익을 추구했던 것이다
중국은 중심이 살아 있는 나라였다

중국은 주변부는 썩었을지 몰라도 중심부는 깨끗한 나라였다
중심이 깨끗한 나라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서방은 중국의 일당 독재를 야유하지만
중국 국민의 공산당 지지율은 90%에 육박한다. 민주적인 다당제 국가 영국의 토니 블레어는
100만명이 넘는 영국 국민이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행진에 나섰는데도
석유 이권 장악 말고는 아무런 명분이 없는 전쟁을 벌여서 150만명 가까운 이라크인을 죽였다
그리고 퇴임해서는 컨설팅 회사를 차려서
쿠웨이트 같은 봉건 왕조 국가로부터 기백만 파운드씩 자문료를 받아챙긴다

앞으로 중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은 중국 노동자에게 월급을 크게 올려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혼다 자동차 공장에서도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이자 혼다 측은 군소리없이 월급을 올려주었다
처음에는 대만 기업과 일본 기업만 시범 케이스로 걸렸지만
앞으로는 서방 기업도 임금 인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도 한국 기업에게는 대안이 있었다
개성 공단이었다
개성 공단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월 76달러로 중국 노동자의 3분의 1 수준이다
개성 공단의 북한 노동력은 문화와 언어를 공유한다는 이점까지 더하면 한국 자본주의 체제로서는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자산이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가 남북 화해를 일관되게 추구하면서 휴전선을 코앞에 둔 개성을
북한이 공단 부지로 내놓도록 결정하게 만든 것도 이런 남북 공생의 시나리오를 내놓아 북한을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시나리오를 견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나리오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한반도 평화 공생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그 시나리오는 청계천 시궁쥐 무리에 의해서 시궁창에 처박혔다
그리고 한반도는 다시 전쟁 일보직전이다

나로호도 괜히 떨어진 것이 아니다
나로호는 국민의 정부 때 러시아의 첨단 우주 기술을 전수받는 데 역점을 두고 벌인 개발사업이었다
자력으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린다는 시나리오에 따라 맺은 계약이었다
발사보다는 기술 이전이 핵심이었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 기술 이전과는 무관하게 엔진 제작을 미쓰비시에게 넘겨버렸다
나로호 발사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한국의 우주 산업에는 큰 도움이 안 되는 시나리오로 만들어버렸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한국 언론이 그렇게 만들었다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왜 유권자에게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자기 나름대로는 이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이명박을 찍어대고 노무현을 저주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몰아간 것이 한국의 언론이었다
공동체 번영의 시나리오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일제 시대부터 지금까지 악착 같은 생존욕으로 공동체를 망쳤으면서
미국이 자국 이익을 위해서 작성한 시나리오가 마치 한국의 국익을 지키는 시나리오인 것처럼
국민을 세뇌하는 데 앞장서는 주류 보수 언론과 냉엄한 국제 현실에서 한국이 장기적으로 택해야 할
진로에 대한 고민 따위는 없고 유럽인이 자기네를 위해서 작성한 시나리오를 얻어들어와서는
한국에 들이미는 유럽물 먹은 먹물 진보와 그 아류가 장악한 주류 진보 언론이었다

한국의 좌우 언론은 번영의 시나리오를 내놓은 대통령에게 민생이나 챙기라면서 한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시나리오가 없거나 남의 시나리오만 읊어대는 껍데기들이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알짜 시나리오를 짠 지도자를 죽였다

똑똑한 정당도 중요하지만 똑똑한 언론은 더 중요하다
똑똑한 언론이 없으면 가짜들이 득세한다
가짜 시나리오들이 진짜 시나리오를 죽인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은 가짜 시나리오 양산소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그리고 노무현처럼 진짜 시나리오를 내놓는 지도자는 또 다시 죽이고야 말 것이다
정당을 통해 진짜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짜 시나리오를 헐뜯고 가짜 시나리오를 퍼뜨리는 언론 세력을 죽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반드시 되풀이된다


(서프라이즈 / 개곰 / 2010-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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