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운영에서 가장 후한 점수를 줘… “매우 역설적이지만 한국에서는 일반적인 현상”
이명박 정권을 비판할 때 흔히 ‘강부자 정권’이라는 표현을 쓴다. 서울 강남의 땅부자 정권이라는
뜻이다.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정책을 보면 ‘강부자 정권’의 면모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정부는 종합부동산세 완화와 부동산 규제 완화를 통해 강남 부유층의 숨통을 트이게 해줬다.
금산분리 완화와 공공부문 민영화도 거대 기업과 일부 부유층에게만 혜택이 집중되는 정책이다.
비정규직법 완화와 최저임금제 개악 시도, 교육 자율화 등은 반대로 저소득층의 경제적 부담을 더욱 증폭시킬 전망이다.
» <한겨레21> 여론조사 결과 저소득층에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가장 높았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지지를 보내는 현상을 흔히 ‘계급배반’이라고 한다.
서울 상계4동 양지마을 전경. 한겨레 김명진 기자
못했다, 저소득층 49%-고소득층 59.4%
서민 생활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복지예산은 어떻게 됐을까? 대부분 크게 후퇴했다.
올해 기초생활보장 예산은 7조1427억원으로, 7조2716억원(추가경정예산 포함)이던 지난해 예산보다
1289억원이 줄었다. 장애인 수당도 지난해보다 413억원이 감소했다. 고령자를 위한 노인 돌봄
서비스 예산도 크게 깎였다.
‘강부자 정권’과 서민 사이의 거리는 이렇게 멀었다. 하지만 <한겨레21>이 2월6~7일 서울 시민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는 지난 1년간의 경험을 배반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평가를 묻는 질문에서 이 대통령에게 가장 후한 점수를 준 계층은
저소득층이었다(도표 참조).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가구당 월소득 250만원 이하의 저소득층 가운데 42.9%는 이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잘했다고 평가했다. 못했다고 본 사람은 49%였다. 반면 월소득 251만~400만원 구간에선
33.3%의 응답자가 잘했다고 대답했고, 62.7%가 못했다고 지적했다.
401만원 이상의 고소득자들도 ‘잘했다’가 33.5%, ‘못했다’가 59.4%였다. 조사 결과를 요약하면,
‘서민이 강부자 정권의 가장 든든한 지지층’으로 나타난 것이다.
저소득층은 이명박 대통령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현 정부의 교육정책과 종부세 완화,
미네르바 구속 등 거의 모든 평가 항목에서 상대적으로 보수적 견해를 보였다.
양대웅 나우리서치 이사는 “부동산 가격의 폭등과 양극화 심화 이후 저소득층이 정치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보이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며 “현 정부가 종부세를 완화하고 복지 지출을 축소해
저소득층의 피해가 예상된다는 지적이 있지만, 한번 형성된 여론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민이 이명박 대통령을 ‘더 많이’ 지지하는 흐름은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겨레>가 1월31일 전국의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정기 여론조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잘하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월소득 200만원 미만의 저소득층(42.3%)에서
평균(34.8%)보다 높았다. 200만~400만원(33.3%)과 400만원 이상(31.4%) 계층에서는 잘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정치인이나 정당에 표를 주는 행위를 흔히 ‘계급배반’ 투표라고 한다.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법과 최저임금제 개악을 시도하는 이명박 정부에 지지를 보내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계급배반 투표는 지난해 4월 18대 총선에서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지역구가 서울 노원병이었다.
총선 직전인 3월24일 한국방송 여론조사에서 당시 노회찬 진보신당 후보(32.6%)는 홍정욱 한나라당
후보(25.6%)보다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월소득 100만원 이하 저소득층에서는
홍 후보(34.7%)가 노 후보(13.3%)보다 높았다.
» 월평균 소득별 이명박 정부 평가
과거 보수 정권은 민생고를 해결했다
지난 수년간 진보개혁 진영을 가장 당혹스럽게 만든 부분도 바로 ‘계급배반의 역설’이었다.
한성욱 진보신당 부집행위원장은 “저소득층이 자신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 서민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 한나라당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며 “매우 역설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에서는 매우 일반적 현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권은 역대 어느 정부보다 성장 위주의 정책을 노골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럼에도 ‘계급배반’의 역설이 반복되는 이유는 뭘까?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역사적 경험에
원인을 돌렸다.
“서민의 시각으로 볼 때 보수 정권은 자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 즉 민생고를 해결해줬다.
박정희 정권은 어쨌든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줬고, 전두환 정권은 물가를 잡아 생계 부담을
줄여줬다. 진보개혁 세력은 민주화를 실현해줬을지 몰라도 정권을 잡은 10년간 양극화가 심해졌다.
서민들은 아직 그들을 ‘나라 말아먹은 세력’으로 보고 있다.”
택시 운전을 하는 강아무개(50대 중반)씨도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다. 2월11일 만난 강씨는
중소기업에 근무하다 5년 전부터 개인택시를 운전하고 있다. 이틀에 한 번꼴로 하루 12시간씩
운전대를 잡는 그의 한 달 수입은 200만원 안팎이다. 강씨는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에게 많은 기대를 했는데 그들이 집권한 기간에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며 “일자리도 갈수록 줄어 아파트 경비
자리라도 얻으려면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지 모른다”고 말했다. 강씨는 “우리 같은 서민이 살기에는
요즘 너무 어렵다”면서도 세계적인 불황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이 기대만큼 경제를 살리지 못하고
있지만 올 하반기가 지나면 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경제적 능력과 학력·연령의 상관관계도 중요하다. 여론조사 업계에서는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연령은 높고 학력이 낮은 경우가 많다고 본다. 이번 <한겨레21> 여론조사에서도 50살 이상에서는
250만원 이하 저소득층(47.1%)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연령별 국정운영 지지도에서
50살 이상(55.8%)은 19~29살(18.8%)이나 30~40대(26.1%)와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학력별로도
중졸 이하(57.4%)와 고졸(32.2%) 및 대재 이상(30.2%)이 확연히 나뉘었다. 홍형식 소장은 “저소득층은 대개 연령이 높고 학력이 낮기 때문에 인권·민주화·평등·분배 등 진보적 가치를 제대로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며 “반면 보수 정당이 강조하는 선진화와 법질서, 경제성장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저소득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주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유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보 수준이 낮은 유권자’(LIV·Low Information Voter)이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LIV는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부족하면서도 강한 정치혐오증을 지니고 있고, 반면
투표장에는 꼬박꼬박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다. 주로 교육 수준이 낮은 저소득층이 LIV로 분류된다.
미국 여론조사 업계에서는 전체 유권자의 5분의 3인 7500만 명을 LIV로 보고 있다.
미국에서 정치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김윤재 변호사는 “미국 민주당이 서민을 위한 정책을 더 많이
갖고 있는데 남부의 백인 노동자가 공화당을 더 많이 찍는 이유도 LIV와 일정 부분 관계가 있다”며
“정책적 측면만 주목한다면 계급배반 현상을 LIV로 설명할 수 있지만, 아울러 정치인과 정당이
자신들의 정책을 충분히 홍보하지 못한 책임도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오히려 저소득층이 종부세 완화에 가장 높은 지지(56.3%)를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겨레 강재훈 기자
성장 이데올로기의 환상
서민이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유를 전적으로 그들의 ‘오해’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중산층과 서민을 대변한다고 자처하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이 저소득층을 위해 제대로 역할을 해본 경험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정치학 박사)은 서민의 이 대통령 지지를 ‘계급배반’으로 이해하는 견해에
반대했다. 여론조사는 언제나 정치적 조건을 고려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박 주간의 주장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 결과나 여론조사 결과를 시민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정당이 형편없으면 유권자의 선택도 형편없을 수밖에 없다. 진보 정당이 대안이라고 생각됐다면
서민이 보수 정권을 더 많이 지지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저소득층과 노동자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치의 중심은 대개 중산층이었다. 게다가 정당 분포 자체가 보수 편향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소득층의 정치 성향이 보수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지적이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수석전문위원은 서민층의 보수화를 사회 안전망의 축소와 연관지었다.
한 위원은 “정부 차원에서 마련해놓은 사회 안전망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보니 서민들은
상대적으로 가장 안전하고 보수적 선택을 하는 역설적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게다가 과거
박정희 정권을 통해 성장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면서 서민층이 사회 안전망 확대를 통한 탈출보다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서민이 진보개혁 진영을 대안세력으로 여기지 않고, 진보개혁 정당은 서민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우위영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악순환’이라고 표현했다. 민노당과 진보신당 등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정당의 경우 시의원이나 구의원 활동을 통해 구체적 성과를 보여줬어야
하는데 그런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는 것이 우 대변인의 말이다.
“서민이 이명박 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정권에 대한 지지라기보다 ‘먹고살기 힘드니
경제를 살려달라’는 표현으로 보고 싶다. 우리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노동자와 서민에게 주장하고
싶어도 당장은 힘든 게 사실이다. 현재의 정치 구도만 탓할 게 아니라, 진보 정당 스스로 끊임없이
실력을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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